중국이 압도적으로 우수한 문자를 갖고 있으면서도 문맹률이 높았던 것은 필기구의 한계 때문이 아니었을까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 먹을 갈고 붓을 꺼내 글을 쓰는 일이 큰 행사로 돼있었고 글쓰기를 하나의 예술로 발달시킨 나라. 일찍이 그토록 종이가 발달했으면서도 근대 산업사회의 대중적응에 뒤처지게 된 것은 이 문맹률과 직결된, 지식전파의 어려움이 큰 원인으로 꼽히기도 했다
1883년 미국의 보험외판원이었던 루이스 에드슨 워터맨이 개발한 현대식만년필은 글쓰는 일을 누구나 간편하게 어디든 관계없이 해결할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문화의 대중화를 이끈 디자인으로 평가 받는다.
인간이 동굴벽에 그림을 새기고 글자를 만들어 역사시대를 열었지만 글을 쓰는 일은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4천년전 에선 과일물에 막대기를 담갔다가 왕의 서신을 썼다고 한다. 18세기 연필이 나오기전 까지는 거위깃털에 잉크를 찍어쓰는 깃털 펜이 애용됐고 산업혁명 이후 강철펜촉과 주머니가 붙어있는 펜대가 사용됐다. 그러나 이것들을 들고 다니면서 글을 쓰기는 번거롭기 그지없었다. 워터맨도 개량 펜대를 들고 보험계약서를 꾸미다가 그만 가 쏟아져 내리는 바람에 계약서를 망쳐 버린데서 새로운 필기구를 만들기로 나섰던 것이다.
가 새지 않으면서 금방 종이에 쓸 수 있는 유명한 모세관식 유출의 워터맨 만년필이 그래서 탄생했다.
1926년 찰스 린드버그가 대서양 횡단비행을 하면서 3천피트 상공에서 비행기록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워터맨 만년필의 자랑으로 기록 돼있다. 만년필 기술 디자인의 발전은 전쟁때 이것이 장교들의 필수품이라는 점 때문에 더욱 경쟁적으로 이루어졌다. 고공에서도 혹한 속에서 도비에 젖어도 가 고르게 나오는 만년필, 주입이 더욱 간단한 디자인 개발이 1,2차 대전을 통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최초의 만년필은 검은색 에보나이트 몸체에 대형 촉이 박혀 있는 간단한 디자인이었다. 여기에 주머니에 꽂고 다닐 수 있게 클립이 붙여졌고 뚜껑도 나사식으로 돌리는 것에서 더 빨리 열었다 닫게 하는 디자인이 등장했다. 잉크 넣는 일도 회사마다 새로운 장치로 승부했다. 쉐퍼만년필은 고무튜브를 누르는 것에서 좀더 간단한 자동 주입기로 발전했고 몽블랑 만년필은 나사를 돌림으로써 펌프질이 되게 하는 획기적인 디자인으로 화제가 됐다. 워터맨은 세계최초 카트리지를 27년에 개발해 냈다.
주머니속에 넣고 다니는 간편한 필기구, 만년필의 대량보급은 1차 대전때 수많은 어머니들이 아들에게 편지를 쓸 수 있게 만들어 전쟁에 커다란 힘을 불어넣는 역할을 했다. 만년필 회사들은 이를 두고 「커뮤니케이션의 총아」라는 선전을 펴기도 했다.
만년필의 디자인적 성공은 기술과 성능의 개발과 함께 「문화의 도구」라는 이미지 선전도 큰 몫을 차지해왔다.
1921년 미국의 필기구회사 파커의 영업사원 루이스테블은 중요한 제안을 했다. 「값비싼 만년필을 디자인해 다른 회사 제품들과 차별화하자」는 아이디어였다. 이 디자인전략은 이내 케네드 파커 사장에게 받아들여져 유명한 「듀오폴드」가 태어났다. 「금보다 더 아름답고 칼보다 더 강한 펜」이라는 선전문구로 이 만년필은 비싼값 때문에 더 잘 팔리는 차별화에 성공했다. 디자이너 스테판 베일리는 「펜을 단순히 쓰는 도구에서 디자인작품으로 개발한 공적을 남겼다」는 칭송을 들었다
셜록 홈즈의 작가 코난 도일은 이 파커 듀오폴드를 쓰면서 『만년 필은 지성인의 소장품』이라고 말해 글쓰기의 중요성을 만년필의 고급성과 연결지었다.
1919년 1차대전 종결 베르사이유 조약때 워터맨으로 사인했다든지,2차대전 끝나고 미주리함에서 맥아더 장군이 대표들에게 미제 파커 만년필로 항복문서에 사인하도록 했던 것은 만년필 디자인사에서 고급만년필의 광고 효과로 인용되는 일화들이다.
세계 고급만년필 판매1위를 기록하고 있는 몽블랑은 유럽에서 가장 높은 산봉우리인 「몽블랑」을 상표로 내걸고 「가장 값비싼 상품」 이미지 굳히기에 전력해왔다. 몽블랑 꼭대기를 그렸다는 하얀 눈송이가 심벌마크. 「필기의 예술」이라는 선전문구를 쓰고있다.
똑같은 성능이면서 상표 이미지 때문에 몇 천원짜리와 수십만원짜리로 차별되는 것이 바로 만년필의 세계. 디자인의 중요성을 설명하는 좋은 본보기로 꼽힌다.
오늘같은 컴퓨터 시대, 이제 만년필은 사라질 것이 아닌가.
연간 50억달러라는 미국의 문필구 시장에서 만년필은 5% 차지가 힘들정도. 만년필은 기념식이나 조약체결때, 사업계약서, 결혼서약서 등에 사인할 때 쓰는 것 정도로밖에 이용가치가 없는 것. 대중적인 사용은 끝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리의 경쟁자는 컴퓨터나 볼펜이 아니라 실크 스카프나 넥타이 같은 고급 액세서리다.』
파커만년필 회사 관계자들의 얘기다. 바로 몇년전 이 회사는 창립 1백주년 기념으로 1930년대의 걸작 듀오폴드 만다린 옐로우를 1만개 한정 제작해냈다. 나라별로 공급량을 정해 배포했는데 한국에는 33개가 배당됐다. 1개 가격 90만원. 그러나 이것은 순식간에 팔려나가 다시 22개를 공수해오는 소동을 벌이기까지 했다.
올해초 나온 쉐퍼만년필도 마찬가지. 1개 1백만원의 금장식의 복고품 쉐퍼는 한국에 70개, 세계전체에 5천개 한정 생산해서 역시 순식간에 매진시켰다.
고급만년필은 이제 귀한 포도주나 비싼 시계처럼 골동품적 가치가 있는가 하면 매킨토시의 나무의자처럼 디자인 작품으로 수집대상이 되고 있다.
『만년필의 문화적 이미지를 강조하는 새로운 디자인전략이 필요해 졌다.』
해마다 주제를 내세우고 하이패션의 유행색을 사용해서 작품만년필을 내놓는 디자이너들은 이제부터는 또다른 차별화전략에 들어섰다고 말한다. 전화 팩스, E메일, 컴퓨터가 우리의 쓰는(필기)문화를 약화시켰다고 개탄의 소리가 쏟아지지만
『요즘은 손글씨가 더 의미있고 가치있다』는 학자들의 얘기처럼 한쪽에선 오히려 인간의 손길과 정성에 대한 요구가 점점 높아져 여기에 대비한다는 것이다.
『좋은 펜은 손의 연장이다.』
새롭게 손의 터치를 중히 여기는 시대가 오고있다고 장담하는 이들은 각자의 개성을표현해주는 만년필 디자인이 이제부터의 과제라고 했다.
『요즘 만년필이라면 이름 쓸때만 사용한다. 그러므로 멋을 생각지않을 수 없다.』
80년대 이른바 「여피」로 불리는 도시의 전문직 젊은 이들이 만년필사치에 몰두한 것도 오늘까지의 만년필 사랑을 잇게 한 원인으로 꼽힌다.
『내가 어찌 수백만 달러 계약을 싸구려 볼펜으로 할 수 있겠는가?』
자동차와 수입 보드카 술을 즐기는 이들은 몽블랑 만년필로 삶의질을 구별지으려 했던 것이다.
「시대에 역행하는 멋」 「기술노예를 거부하는 증거」 「환경보호의 차원」에서 1회용 볼펜이나 컴퓨터보다 만년필을 선호할 것이라고 보는사람들도 적지않다.
「손으로 글씨 쓰는 것은 사람을 마음으로 부르는 것」이라고 했던 괴테의 말을 선전에 활용하는 만년필회사 사람들은 이 시대 개성 표현의 마지막 수단이 「글씨」라고 내세운다. 만년필이 바로 우리의 마지막 개인소지품이며 「생각하는 도구」라는 것이다.
『때문에 소유자의 개성과 마음을 표현하는 디자인이 성패를 좌우할 것이다.』.
요즘 세계의 전통깊은 필기구 회사들은 여기에다 또다른 차별화 전략을 맞추고 있다.